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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칠레 공화국(스페인어: República de Chile 레푸블리카 데 칠레[*]) 또는 칠레(Chile)는 남아메리카 남부에서 안데스 산맥 정상을 잇는 선을 국경으로 하며 태평양과 안데스 산맥 사이에 있는 공화국이다. 여러 부족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살고 있던 땅이며 에스파냐인에 의해 1541년 산티아고에 성채가 세워진 후 300년의 식민지 시대를 지나 1818년 크리오죠 주도의 독립 선언을 하고 칠레 공화국으로 출발하였다. 지정적으로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남아메리카 남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남부 공유 시장(Mercado Común del Sur / 메르카도 코문 델 수르, MERCOSUR)의 준회원국으로 미국과 2004년 자유 무역 협정을 맺고 유럽 연합과도 토론이 진행되는 등 경제 활동이 남미에서 가장 활발하다.
[편집] 역사[편집] 초기1531년 스페인 정복자들은 잉카 제국(현 페루)을 지배하고 제국의 남부에 위치한 땅들을 취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다. 이러한 초기 정복자 중 하나는 디에고 데 알마그로(es:Diego de Almagro)이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es:Francisco Pizarro)와 영토 분쟁을 일으킨 후 그는 1535년 남쪽을 향한 탐험에 나서서 "칠레의 발견자"로 여겨지나 이 땅은 이미 임자가 있는 땅이였다. 그 후 페드로 데 발디비아(es:Pedro de Valdivia)는 1540-1541 사이에 걸쳐서 아타카마 사막에 성채등을 쌓았다. 그리곤 1541년 2월 12일 그는 산타 루시아 기슭에 산티아고 데 누에바 엑스트레마두라를 건설하게 된다. [편집] 식민 시대1500-1800 칠레 대장권(Capitanía General de chile)는 행정적으로 페루 부왕국(Vierreinato del Perú) 소속하에 있었다.
[편집] 독립칠레는 1810년대까지 스페인의 식민 통치 하에 있었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의 왕을 강제로 교체하며 식민 지배 제도에 일대 혼란이 일어나자 세계 각지의 스페인 식민지 크리오요 (es:criollo) 지도자들은 임시 통치 기구 (es:Junta de Gobierno)를 설립하게 된다.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마누엘 로드리게스 등을 필두로 1810년에 시작된 독립 세력은 스페인의 재침략 군대에 밀려 1814년경 아르헨티나로 피신했다가 1817년 다시 안데스 산맥을 넘어 산띠아고 탈환에 성공한다. 그리하여 베르나르도 오히긴스가 초대 감독으로 취임하며 반대 세력들을 숙청한다. 1820년, 베르나르도 오히긴스는 산 마르틴과 공동으로 페루에 독립 지원 군대를 보내 페루를 독립시키고 베네수엘라 연방을 설립 중이던 시몬 볼리바르를 만나 남미 독립 운동의 철학에 의견 차이를 보이곤 서로 헤어진다. [편집] 공화국
[편집] 사회주의 정권1970년, 칠레 공산당 후보인 파블로 네루다와 단일화를 이룬 인민연합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는 30% 남짓의 지지도를 바탕으로 그해 총선거에 승리하였다. 아옌데 대통령은 곧바로 사회 제도 개혁에 착수하는데,이는 칠레의 부를 독점하는 소수의 자본가들과 칠레경제를 지배하는 미국계 기업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는 사회개혁내용을 볼 수 있는데, 아옌데 대통령은 자본가들이 독점한 부의 일부를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극심한 빈부의 격차문제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또한 미국 광산 회사 아나콘다 (Anaconda)가 소유한 추키카마타 (es:Chuquicamata) 구리 광산을 국유화하여 외국계 기업들에 의한 국부(國富)유출을 막고자 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미 정부는 국제 구리 값을 폭락 시키고 칠레 경제는 공황을 겪게 된다. 또한 미국 CIA에서는 세계최초로 사회주의 정권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들어선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껴 아옌데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펴기 시작한다. 하지만 칠레 국민들은 사회개혁을 실천한 아옌데를 지지하여 더 높은 지지율로 재선시킨다. 그러자 칠레 자본가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해고와 가축도살을 통한 실업과 식량난을 조장하였으며, 친미파 장교들이 지배하던 군부에서는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 그럼에도 아옌데 대통령은 국가전복음모를 꾸민 군부를 견제하기보다는, 국민투표로 국민의 심판을 받자는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군부에서는 질 것이 뻔한 게임에 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폭력으로 나라를 뒤집기에 이른다. [편집] 극우 군사 독재1973년 9월 11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군은 공군 장성 출신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es:Augusto Pinochet)를 필두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호크기를 이용해 라 모네다(칠레의 대통령궁)을 폭격하는 와중에 아옌데는 대(對)국민 선언을 라디오를 통해 전하고서는 권총으로 피노체트 군에 저항했으나 결국 자살했다. 정권을 탈취한 피노체트 및 장성들은 훈타라고 불리는 삼인 체제를 설립하고 곧 피노체트의 독재가 시작된다. 피노체트는 지금도 칠레 국민들이 살인마라고 부를 정도로 증오하는 대상인데, 그 이유는 16년간의 독재기간동안 정치적 반대자들을 학살,고문,연행등으로 탄압했기 때문이다. 현재 칠레정부에 의해 밝혀진 피노체트군사정권당시 인권침해피해자는 피살자 3,197명(실종자 1,197명포함), 고문피해자 만여 명이며[1], 군사정권 치하에서 연행된 사람은 10만여 명이나 된다. 의회가 폐쇄되고, 그의 말 한마디가 없으면 나뭇잎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고 피노체트 자신이 말할 정도로 심각한 독재로 인해 칠레 국민들은 고통받았다. 또한 피노체트 자신은 경제발전을 약속했으나 오히려 물가가 상승하는등 경제난은 더 심각해졌다. [편집] 민주화1989년 선거 후 피노체트 군사정권은 국민들의 환호 속에서 물러났으며, 그 이전부터 군정권의 박해를 받아가면서 진행된 민주화 요구 시위가 있었다. [편집] 지리서쪽은 태평양, 동쪽은 안데스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에는 寒流 사막지대가, 중남부에는 피오르드 해안이, 남부에는 빙하 지대가 있다. 지리적 특성에 따라 이름이 있다.
이들은 구분 할 때 네가지 지리적 특성을 구분한다.
대북부는: [2]
소북부 [3]
중부 [4]
남부 [5]
파타고니아. [6]
[편집] 행정 구역
칠레는 13개 행정 주(regiones / 레히오네스)로 나뉜다.
[편집] 칠레의 기후
[편집] 정치
선거구를 가진 당
1988년 민주화 요구시위에 마지못해서 허락한 신임 투표에서 피노체트는 민중들의 비폭력적인 반 피노체트 운동으로 패하여 물러나야 했다. 선거가 열렸을때 사회당, 기독교 민주당, 민주당과 국가재건당이 주력이 되어서 좌파와 우파를 포괄하는 중도 연합전선(La Concertación)을 만들었다. 2000년에 선거에서 승리한 Ricardo Lagos 대통령 또한 연합 전선 (칠레 사회당 소속) 후보이다. 50%에 가까운 지지율을 보이며 라고스 후보에게 패배한, Opus Dei 회원인 Lavin 후보는 UDI 소속이며 칠레 정치 내에서는 가벼운 극우에 속한다.2006년초에는 중도 좌파성격의 여성 대통령인 미첼레 바첼레트 후보가 칠레 정치역사 최초로 당선되었다. 현재 그는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인권탄압이라는 과거사를 청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정치 형태는 대통령제이며 5년마다 대통령 선거가 있다.
[편집] 경제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안정된 경제 구조를 가진다. 칠레의 거시 경제적 예측 가능성과 민주적 정부의 안정화는 칠레를 투자하기에 적합한 나라로 만들었다. [편집] 산업칠레는 천연 자원이 비교적 적다. 오직 북부 지역에만 구리, 철 등의 풍부한 광산 자원이 존재한다. 중부 지역은 포도 재배와 농경업에 의지하며 남부는 수산업 (특히 연어 양식)과 삼림업에 종사한다. 칠레는 80년대부터 1997년까지 연평균 7%의 성장을 지속해왔다. 97년은 아시아의 금융 위기를 맞이하여 성장이 느려지며 2004년에는 6.1%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여러 조치를 통하여 2005년에는 6.25%의 성장률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칠레 경제는 상당히 경쟁적이며 피노체트 독재 시절부터 신 자유 주의 시장 정책 노선을 택하여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편집] 관광업[편집] 주민메스티소와 스페인系 백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이탈리아, 독일, 영국, 그리스, 프랑스계와 인디언, 아랍계와 중국계가 있다. 독일계 이민자는 주로 남부에 치중되어 있으며 1차 대전을 전후하여 칠레 정부에서 땅을 개발할 목적으로 초대한 이들이 많다. 파타고니아 지역에는 유고슬라비아 및 동유럽/중부유럽 이민자들이 많으며, 북부 광산 지역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민해온 중국계 노동자들이 페루 남부와 칠레 북부에 걸쳐 살고 있다. 칠레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각 지역 원 주민인 인디오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편집] 마푸체칠레 제9주에는 가장 큰 인디오 민족 마푸체(Mapuche)가 거주한다. 칠레 인구중 약 100 만명이 마푸체라고 주장하며, 주로 제9주와 산티아고 부근에 집중하여 살고 있다. 그들의 언어는 마푸둔군(Mapudungun)이다. 마푸체는 "땅의 주민들"이라는 뜻이다(마푸: 땅, 체:사람). 마푸체는 다시 북쪽 땅의 사람들인 페우엘체와 남쪽 땅의 사람들인 우이지체로 구분된다. [편집] 한국인칠레의 한인 사회는 수도 산티아고에 집중되어 있으며 대략 1,500 명 정도이다. 주로 소매 및 도매업에 일한다. [편집] 언어공용어는 에스파냐어를 사용한다. 독일어, 그리스어,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가 쓰인다. 원주민들은 마푸둔군(마푸체어), 케추아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편집] 교육이 나라의 HDI는 37위로 교육은 안전하다. [편집] 2006년 고등학생 시위 (펭귄 혁명)[편집] 종교[편집] 그리스도교
피노체트의 군사독재당시 칠레 로마가톨릭교회는 교우들이 국민들을 살인, 고문등의 국가폭력으로 탄압하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당하자, 1973년 10월 정의평화위원회를 구성,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정의평화위원회에는 로마가톨릭교회 외에도 유대교, 정교회, 개신교,성공회에서도 참여했다. 7명의 로마가톨릭 사제들이 살해당할 정도로 평화위원회는 군사독재정권의 큰 탄압을 받았으며,지도자로 활동하던 추기경도 피노체트 군부독재정권으로부터 붉은 추기경(Red Cardinal)이라는 비난을 받을만큼 미움받았다.[1] 칠레교회에서 로마가톨릭은 57.7%를 차지한다.
칠레 개신교회는 칠레교회의 27.9%를 차지하고 있으며, 교파는 감리교,오순절교회등이 있다.
칠레성공회(스페인어: Iglesia Anglicana del Cono Sur de America)는 칠레의 성공회 관구교회이며, 관구장은 그레고리 야메스 베나블레스 주교(The Most Revd Gregory James Venables)이다. [편집] 유대교유대교는 전 종교인의 0.2%를 차지한다. [편집] 바깥 고리
[편집] 칠레 정부[편집] 칠레의 매체
*Bío-Bío 라디오 [편집] 칠레의 대학[편집] 칠레의 포털 사이트
[편집]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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